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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알카사르 여행기: 그라나다 알람브라의 짝, '왕좌의 게임' 도르네의 물의 정원 속으로!

ohara 2025. 10. 1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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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태양의 도시 세비야(Seville)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제 발길을 끈 곳은 바로 레알 알카사르(Real Alcázar de Sevilla)였습니다. '알카사르(Alcázar)'라는 이름은 아랍어 '알 카스르(al-qaṣr, 왕자의 방 또는 왕궁)'에서 유래했으며, 스페인에 남아있는 이슬람 시대 성채나 궁전을 뜻합니다.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Alhambra Palace)을 방문했던 기억이 워낙 강렬했기에,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또 어떤 모습일지 큰 기대를 안고 들어섰습니다.

알카사르에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감탄사는 바로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붉은 성벽이 인상적인 알람브라가 다소 웅장하고 압도적인 느낌이었다면,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좀 더 섬세하고 우아하며, 다채로운 타일과 장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이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왕궁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11세기 무어인(이슬람 세력)의 요새에서 시작해 수 세기에 걸쳐 증축되며 다양한 건축 양식이 녹아든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입니다.

 

 


무데하르 양식의 정수, 페드로 1세 궁전

세비야 알카사르의 핵심이자 가장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은 바로 페드로 1세 궁전(Palacio de Pedro I)입니다. 14세기 기독교인인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Pedro I of Castile, '잔혹왕'이라는 별칭도 있습니다)의 명령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이 궁전의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합니다.

당시 이슬람 건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페드로 1세는, 이슬람 세력이 물러난 후에도 기독교 지역에 남아 살았던 이슬람 장인, 즉 무데하르(Mudéjar) 장인들을 고용하여 궁전을 짓게 했습니다. 무데하르 양식이란,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 이슬람 건축 양식과 기술이 융합되어 발전한 독특한 예술 양식이라고 합니다.

처녀들의 안뜰: 파티오 데 라스 돈셀야스 (Patio de las Doncellas)

궁전의 중심부에 자리한 처녀들의 안뜰은 알카사르의 영혼과 같은 곳입니다. 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는 수로와 양옆을 둘러싼 우아한 아치형 회랑, 그리고 벽면을 장식한 정교한 타일(Azulejos)과 석고 조각(Yesería)은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이곳을 보며 그라나다의 알람브라에 있는 '사자의 안뜰(Patio de los Leones)'과 비슷한 고전적인 균형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햇빛 아래 반짝이는 타일 장식과 대칭을 이루는 건축 구조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한'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절제된 미학을 보여줍니다.

이 안뜰의 이름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처녀들의 안뜰'이라는 이름은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왕국으로부터 매년 100명의 처녀를 공물로 받았다는 다소 부정확한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며, 최근 고고학적 발굴과 복원 작업을 통해 이 안뜰은 원래는 수로가 아닌 중앙 정원 형태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대사의 방: 살론 데 로스 엠바하도레스 (Salón de los Embajadores)

 

페드로 1세 궁전의 백미는 단연 대사의 방입니다. 이곳은 왕의 알현실이자 가장 중요한 공식적인 장소였습니다. 방 전체를 감싸는 금빛 장식과 화려한 타일, 그리고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반구형의 황금 돔 천장입니다. '반구형의 낙원(Media Naranja)'이라고도 불리는 이 천장은 무데하르 양식의 목공예(Artesonado) 기술의 정점이며, 수많은 별과 기하학적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마치 하늘의 별자리가 땅에 내려온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 화려함은 권력과 부를 과시하려는 페드로 1세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알카사르의 정원과 재미있는 이야기

궁전 내부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서면, 알카사르의 넓은 정원(Jardines del Alcázar)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무어 양식,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된 이 정원은 분수, 연못, 오렌지 나무와 야자수가 가득하여 복잡한 도심 속에서 평화로운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마리아 파디야의 욕실 (Los Baños de Doña María de Padilla)

정원 지하에는 '마리아 파디야의 욕실'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곳은 실제로 마리아 파디야가 목욕을 했던 곳이라기보다는 빗물을 저장하던 물탱크였으며, 카스티야의 왕비가 아닌 페드로 1세의 애첩이었던 마리아 파디야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녀가 이곳의 서늘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즐겨 찾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치형 지하 공간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흑태자의 루비 이야기

페드로 1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왕실 보물 중 하나인 '흑태자의 루비(Black Prince's Ruby)'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보석은 루비가 아닌 스피넬(Spinel)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루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페드로 1세는 알카사르에서 그라나다의 에미르(이슬람 군주)를 초대했는데, 그를 살해하고 이 보석을 빼앗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페드로 1세가 자신의 형제와 왕위 다툼을 벌일 때, 자신을 도와준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 보석을 선물했고, 이 루비는 지금까지 영국 왕관에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알카사르의 아름다운 벽돌 하나하나에는 피와 권력, 욕망이 뒤섞인 역사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 도르네의 물의 정원

최근 세비야 알카사르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인기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의 촬영지였기 때문입니다.

시즌 5부터 등장하는 '도르네(Dorne)' 왕국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물의 정원(Water Gardens)'이 바로 이곳 알카사르의 정원과 궁전 내부에서 촬영되었습니다. 특히 대사의 방은 제이미 라니스터가 도르네의 군주를 만나는 장면의 배경이 되었고, 아름다운 정원과 수은 연못(Mercury's Pool) 주변에서는 마르텔 가문의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드라마 속 '물의 정원'을 상상하며 알카사르를 거닐면, 마치 웨스테로스 대륙의 남쪽 끝 왕국에 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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