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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그리기까지 평생이 걸렸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 만난 십 대의 경이로운 피카소와 숨겨진 이야기

ohara 2025. 10. 1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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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천재의 발자취를 걷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감동 방문기


 

피카소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예술 애호가라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Museu Picasso)은 하나의 성지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저 역시 그곳을 직접 방문했을 때, 온몸을 휘감는 전율과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거장의 작품을 눈앞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그의 삶과 예술적 여정에 동행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피카소의 그림은 종종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추상적인 형태와 파격적인 시도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때로는 이해의 장벽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은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카소'가 되기 이전, 순수하고 열정 넘쳤던 젊은 피카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했습니다.

젊은 천재의 탄생: 피카소의 초기 걸작들을 만나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초기 작품' 컬렉션에 있습니다. 4,200여 점이 넘는 소장품 중 대다수가 피카소의 형성기(Training Period)와 청색 시대(Blue Period)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는 말라가에서 태어났지만, 14세에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예술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15세에 그린 대작 '첫 영성체(First Communion, 1896)'와 16세 때 그린 '과학과 자비(Science and Charity, 1897)'와 같은 초기 아카데미즘 화풍의 작품들입니다. 이 그림들은 피카소가 이미 십 대 시절에 완벽한 구도와 기교를 마스터했음을 증명합니다. 특히 '과학과 자비'는 당시 공식적인 미술계에서도 인정을 받아 그의 뛰어난 재능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입니다.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인 초기 작품들을 보노라면, 피카소 스스로가 했던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정형화된 기법을 완벽하게 익힌 후,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 했던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독과 슬픔의 색채: 청색 시대의 깊은 울림

 

미술관 관람의 정점 중 하나는 바로 청색 시대(1901-1904년) 작품들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친구 카를레스 카사헤마스(Carles Casagemas)의 비극적인 자살과 가난했던 파리 생활은 피카소에게 깊은 우울과 고독을 안겼고, 그의 화폭은 푸른색과 청록색 계열의 차가운 색채로 물들었습니다.

이 시기 작품들, 예를 들어 '웅크린 여인(Crouching Beggarwoman, 1902)'이나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 1903)' 등의 인물들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소외된 이들, 즉 거지, 병자, 매춘부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의 길게 늘어진 형상과 슬픔을 머금은 눈빛은, 피카소가 느꼈던 깊은 인간적인 연민과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관람객에게 강렬한 감정적 울림을 선사합니다. 저는 이 청색 시대의 작품들 앞에서 피카소의 난해함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와 감정에 압도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은 후기 작품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시리즈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명작 '시녀들(Las Meninas)'을 피카소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라스 메니나스 시리즈(Las Meninas Series, 1957)' 전체(58점)입니다. 입체주의(Cubism)를 포함한 다양한 기법으로 벨라스케스의 원작을 분해하고 재조립한 이 시리즈는 피카소의 예술적 탐구와 거장들에 대한 존경을 동시에 보여주는 독특한 컬렉션입니다. 이 모든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이곳,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뿐입니다.

 

한국에서의 대학살

 

그리고 솔직히 가장 충격적이었던 작품은 《한국에서의 대학살 (Massacre in Korea)》이었어요. 스페인 출신인 피카소가 우리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 바로 한국 전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돋았죠. 한국에서의 대학살은 피카소가 게르니카 (Guernica)(1937), 납골당 (The Charnel House)(1945)에 이어 세 번째로 그린 주요 반전화라고 합니다. 이 그림은 1951년작으로, 전쟁 중 무고한 여성과 아이들을 겨냥한 비인간적인 폭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선 기계 같은 철갑옷을 입은 군인들과 왼쪽에 벌거벗은 채 공포에 질린 희생자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특히 가해자인 군인들에게 성기가 없는 것을 보고 피카소의 신랄한 비판 정신에 감탄했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스스로의 인간성마저 거세한다'는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하던지, 게르니카만큼이나 압도적인 반전(反戰)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이 그림은 주로 미군 주도의 반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한동안 반공법 등의 이유로 전시가 금지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림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우리 역사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는 '차가운 거울' 같았던 작품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작품만큼 매력적인 공간: 중세 고딕 양식의 팔라우

피카소의 작품만큼이나 미술관의 공간 자체도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피카소 미술관은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의 라 리베라(La Ribera) 지구, 몬카다 거리(Carrer de Montcada)에 위치한 5개의 연결된 중세 고딕 양식 궁전(Palau)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지어진 이 궁전들은 본래 귀족 가문의 저택이었습니다.

돌로 된 아치형 안뜰, 우아한 계단, 그리고 화려한 고딕 양식의 천장 장식은 현대 미술 작품과 중세 건축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고풍스러운 궁전의 돌벽과 피카소의 파격적인 작품들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줍니다.

미술관이 이곳에 세워진 것 자체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본래 피카소의 평생 친구이자 비서였던 하우메 사바르테스(Jaume Sabartés)가 피카소에게서 받은 개인 소장품을 기증하여 미술관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당초 사바르테스는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에 세우려 했으나, 피카소는 자신이 젊은 시절 예술가로 성장했던 바르셀로나를 더 적합한 장소로 추천했습니다.

1963년에 문을 열었을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 정권 시절이었고, 프랑코 정권에 반대했던 피카소의 이름을 내세우기 어려워 처음에는 '사바르테스 컬렉션'으로 개관했다고 합니다. 이후 사바르테스가 사망한 1968년, 피카소는 친구를 기리기 위해 '라스 메니나스 시리즈'를 포함한 대규모 작품을 바르셀로나 시에 기증하면서 미술관은 비로소 '피카소 미술관'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이처럼 미술관은 피카소와 바르셀로나 시, 그리고 그의 친구와의 우정과 깊은 유대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피카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엘 본(El Born)' 지구

피카소 미술관이 위치한 엘 본(El Born) 지구는 피카소가 살고, 배우고, 영감을 얻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미술관을 나와 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그가 친구들과 어울렸던 전설적인 카페 '엘스 콰트레 가츠(Els Quatre Gats)' 등 그의 청춘이 묻어있는 장소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미술관 관람은 예술 감상을 넘어, 한 천재 예술가의 생애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함께 경험하고,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가 아는 '피카소'가 되었는지 이해하는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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