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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멈춘 땅, 물이 빚어낸 기적: 네덜란드 킨더다이크 풍차 여행기 (feat. 고양이와 아기)

ohara 2025. 10. 15.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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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의 미래에서 킨더다이크의 과거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미래를 짓는 도시입니다. 큐브 하우스(Cube Houses)의 기하학적 건축미와 에라스무스 다리(Erasmus Bridge)의 우아한 곡선은 '혁신' 그 자체를 상징하죠. 하지만 이 첨단 도시에서 불과 16km 남짓 떨어진 곳에, 네덜란드의 정체성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시간이 멈춘 마을이 존재합니다. 바로 킨더다이크(Kinderdijk)입니다.

이름부터 신비로운 '아이의 둑(Kinderdijk)'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19개의 우아한 풍차들이 나란히 서 있는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풍차 마을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인류의 위대한 '물과의 투쟁' 기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브뤼흐(Erasmusbrug) 선착장에서 워터버스(Waterbus)를 타고 약 30분 만에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19개의 거인들이 지킨 땅: 네덜란드 물 관리의 완벽한 시스템

 

킨더다이크는 그냥 관광지가 아닙니다. 네덜란드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였던 1421년 성 엘리자베스 홍수(Saint Elizabeth flood) 이후, 저지대 땅인 알블라써르와르드(Alblasserwaard polder)를 물로부터 지키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수력 공학 시스템의 핵심입니다.

제가 킨더다이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평화로움'이 아닌, '팽팽한 긴장감'이었습니다. 이 평화로운 들판 아래에는 끊임없이 물을 빼내야 하는 숙명적인 노력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킨더다이크 풍차의 비밀: 2단계 양수 시스템

 

킨더다이크의 풍차들은 두 줄로 나뉘어 서 있습니다.

 

네더르와르드 풍차(Nederwaard mills, 붉은 벽돌): 낮은 수로의 물을 1.4m 높이의 중간 저수지로 끌어올립니다.

 

오버르와르드 풍차(Overwaard mills, 초가지붕의 팔각형 목조): 중간 저수지의 물을 1.5m 더 높은 최종 배수로로 끌어올려 강(렉강 또는 노르트강)으로 방류합니다.

이처럼 풍차들은 약 2.9m의 수위 차를 두 단계에 걸쳐 물을 끌어올리는 정교한 릴레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1740년을 전후하여 건설된 19개의 풍차들은 이 저지대를 수백 년 동안 건조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유네스코가 이곳을 '인간의 독창성과 물과의 투쟁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고 극찬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둑' 전설: 고양이와 요람의 이야기

킨더다이크의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마을 이름인 '아이의 둑(Kinderdijk)'의 의미가 궁금해집니다. 그 배경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홍수 전설 중 하나가 있습니다.

1421년 대홍수가 지나간 뒤, 마을 사람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나무 요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요람이 둑에 가까워졌을 때,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요람 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고, 덕분에 요람은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요람 속에는 아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둑을 '아이의 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킨더다이크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생명과 희망을 지켜낸 장소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겨진 드라마틱한 역사는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풍차지기의 삶을 엿보다: 박물관 풍차 방문

 

킨더다이크를 방문하는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풍차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19개의 풍차 중 네더르와르드 박물관 풍차(Museummolen Nederwaard)와 블록웨이르 박물관 풍차(Museummolen Blokweer) 두 곳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저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네더르와르드 풍차 내부를 방문했습니다. 풍차 안은 예상보다 훨씬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이었습니다. 한때 풍차지기 야콥 훅(Jacob Hoek)과 그의 아내가 10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공간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풍차 내부 관람의 묘미:

  • 아래층의 부엌과 거실: 한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난로 근처의 좁은 방에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소박한 공간이었습니다.
  • 위층의 기계장치: 거대한 회전 축과 기어, 그리고 물을 퍼 올리는 날개로 연결된 복잡한 기계 장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계들이 밤낮없이 돌아가며 마을의 생명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 '밀러의 면허(Miller's diploma)': 현재 킨더다이크의 풍차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이 거주자들 중 다수는 실제로 풍차 작동 면허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현대식 펌프가 역할을 대체했지만, 풍차는 여전히 비상시에 작동할 수 있도록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킨더다이크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인 셈입니다.

킨더다이크를 즐기는 꿀팁: 자전거 vs. 워터버스

킨더다이크의 매력적인 풍경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최고입니다.

  • 자전거(Cycling): 로테르담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운하를 따라 약 1시간 정도 라이딩하면 킨더다이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마을 내부의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차량 통행 제한)를 따라 19개 풍차를 모두 둘러보는 것이 가장 자유롭고 풍요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워터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워터버스(Waterbus):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브뤼흐(Erasmusbrug)에서 라인 21을 타면 약 30분 만에 직행으로 도착합니다. 강 위에서 로테르담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며 풍차 마을로 향하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투어가 됩니다.

여행 팁: 풍차가 가장 활발하게 돌아가는 날은 5월 둘째 주 토요일인 '네덜란드 풍차의 날(National Mill Day)' 이라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이 시기에 맞춰 방문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또한, 일몰 무렵의 킨더다이크는 운하에 비친 풍차 실루엣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환상적인 사진을 남길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진정한 영웅들을 만나다

현대 네덜란드의 상징이 첨단 기술이라면, 그 기반은 킨더다이크의 풍차들에 있습니다. 땅을 물에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수백 년간의 고군분투, 그리고 그 노력을 통해 기어코 땅을 되찾아낸 인간의 독창성. 킨더다이크는 그 모든 것을 말해주는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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