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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과 공학의 교차로: 스페인 세고비아, 디즈니 성의 영감을 찾아서

ohara 2025. 10. 1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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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첫인사: 2000년 역사가 숨 쉬는 거대한 돌의 벽

 

마드리드에서 고속열차(AVE/Avant)로 약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도시, 세고비아(Segovia). 이 도시는 스페인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심장부에 위치하며, 역사와 전설, 그리고 건축적 경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습니다. 세고비아는 도시 전체가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2000년의 시간을 견뎌낸 거대한 건축물, 로마 수로(Acueducto de Segovia)가 있습니다.

고속열차역에서 구시가지로 향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수로의 모습은 감탄을 넘어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접착제나 시멘트 없이 오로지 정교한 힘의 균형만으로 쌓아 올려진 167개의 아치가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엄했습니다. 수로가 가장 높은 지점인 아소게호 광장(Plaza del Azoguejo)에서는 높이가 28m에 달하며, 마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거인의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로마 공학의 '악마의 계약'

 

이 수로는 기원후 1세기 후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합니다. 프리오강(Río Frío)의 물을 약 15km 떨어진 도시까지 끌어오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20세기 초까지도 실제로 사용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거대한 화강암 블록들이 어떠한 접착제나 모르타르 없이 무게와 균형만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지에는 이 수로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물을 길러 나르는 일에 지친 한 소녀가 악마와 계약을 맺었는데, 악마가 하룻밤 사이에 도시까지 물을 끌어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면 영혼을 바치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새벽닭이 울기 직전에 수로가 거의 완성되었지만, 마지막 돌 하나가 부족해 소녀는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토록 완벽한 건축물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중세 사람들의 경외감을 잘 보여줍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백설공주의 알카사르

 

로마 수로에서 시작된 중세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의 가장 서쪽 끝, 두 강이 만나는 절벽 위에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는 성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세고비아 알카사르(Alcázar de Segovia)입니다.

이 성의 외관은 많은 여행자에게 동화 속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나오는 사악한 여왕의 성 디자인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에서는 신데렐라 성의 모티브 중 하나로도 거론됩니다. 실제로 뾰족한 푸른 지붕과 낭만적인 탑들이 어우러진 알카사르의 실루엣은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것 같았습니다.

왕실의 요람이자 요새

 

12세기부터 존재 기록이 있는 이 알카사르는 단순한 요새가 아니었습니다. 중세 내내 카스티야 왕국 국왕들이 가장 사랑했던 거주지 중 하나였으며, 특히 이사벨 1세(Queen Isabella I)가 1474년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즉위했던 중요한 역사적 무대이기도 합니다.

성 내부를 둘러보면 그 화려한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왕들의 방(Hall of Kings)에는 스페인 역사 속 52명의 군주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왕좌의 방(Throne Room)의 무데하르 양식(Mudéjar, 기독교 건축에 이슬람 예술이 결합된 양식) 천장 장식은 그 정교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알카사르의 가장 높은 탑인 후안 2세의 탑(Torre de Juan II)에 오르면, 세고비아의 구시가지와 광활한 평원, 그리고 로마 수로의 끝자락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대성당의 숙녀': 고딕 양식의 마지막 숨결

 

세고비아의 세 번째 상징은 도시 중앙의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을 압도하는 세고비아 대성당(Catedral de Segovia)입니다. "대성당의 숙녀(The Lady of Cathedrals)"라는 별명을 가진 이 건물은 그 거대함과 우아함 덕분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대성당은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16세기 초,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유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고비아 대성당은 1525년 건설을 시작하여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위대한 고딕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코무네로스의 반란(Revolt of the Comuneros)으로 인해 이전의 로마네스크 대성당이 파괴되자, 후안 길 데 온타뇽(Juan Gil de Hontañón)을 중심으로 카스티야 후기 고딕 양식의 정수를 계승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장엄함 속의 섬세함

대성당 내부는 3개의 웅장한 신랑(Naves)과 돔으로 덮인 트랜셉트(Transept)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높이가 33m에 달합니다. 특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16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내부 공간에 신비롭고 영적인 빛을 채워 넣습니다. 화려함보다는 우아하고 고결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이 성당은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장엄함이 집대성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고비아 대성당 박물관에는 스페인 최초의 인쇄물 중 하나인 ‘아길라푸엔테 종교 회의록(Sinodal de Aguilafuente)’ 등 귀중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스페인의 초기 인쇄술 역사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세고비아에서

세고비아는 수로, 알카사르, 대성당이라는 세 가지 상징적인 건축물이 하나의 긴 바위 능선 위에 나란히 서 있는 독특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공학, 중세 왕국의 전설, 그리고 고딕 건축의 마지막 숨결이 완벽하게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세고비아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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