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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 매달린 기적: 스페인 쿠엥카, 한국 파주와의 특별한 인연을 찾아서

ohara 2025. 10. 14.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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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만남: 쿠엥카에서 발견한 '파주의 흔적'

마드리드에서 고속열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자리한 스페인 중부의 도시, 쿠엥카(Cuenca). 이곳은 그야말로 지형이 만들어낸 기적의 도시입니다. 후카르강(Río Júcar)과 우에카르강(Río Huécar)이 빚어낸 깊은 협곡 사이에 험준한 바위 능선을 따라 형성된 구시가지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낯선 유럽의 중세 도시에서, 저는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가운 '한국'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쿠엥카의 여행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한글 여행 안내지를 받아 들었을 때였습니다. 안내지의 한쪽 구석에는 쿠엥카가 한국의 도시 파주(Paju)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글 안내지는 파주에서 제작해서 보내준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경기 북부의 파주가 스페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와 공식적인 교류를 맺고 있다니!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도시가 아닌 지역 도시가 이 먼 유럽의 중세 도시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특별한 연결고리는 여행객에게는 작은 도시 간의 문화 교류가 얼마나 풍성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즐거운 증표였습니다. (실제로 파주시는 2008년 10월 7일 쿠엥카와 자매결연을 체결하며 문화, 교육 등의 분야에서 교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쿠엥카의 돌길을 걷기 시작하니, 이 도시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 '매달린 집(Casas Colgadas)'의 기적

쿠엥카를 상징하는 것은 단연코 '카사스 콜가다스(Casas Colgadas)', 즉 매달린 집입니다. 우에카르 강 협곡의 아찔한 절벽 끝에 마치 공중에 매달린 듯 위태롭게 자리 잡은 이 건물들은 쿠엥카의 독특한 지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천년의 지혜가 담긴 건축술

매달린 집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불분명하나, 15세기 문헌에 이미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형태의 집들이 강변 절벽을 따라 더 많았지만, 현재는 몇 채만 남아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무 발코니가 돋보이는 3채의 건물이며, 이 중 하나는 현재 스페인 추상 미술관(Museo de Arte Abstracto Español)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미술관 방문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절벽 끝에 매달린 건물의 내부 공간을 직접 경험하는 짜릿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포토존: 산 파블로 다리 (Puente de San Pablo)

매달린 집을 가장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는 맞은편 절벽을 잇는 산 파블로 다리입니다. 16세기 석조 다리가 무너진 후 1902년에 철제 구조물로 재건된 이 다리는 아찔한 높이와 흔들림으로 스릴을 더합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우에카르 협곡의 깊이와 그 너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매달린 집의 모습은 쿠엥카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쿠엥카 구시가지: 스페인 최초의 고딕 성당을 찾아서

쿠엥카 구시가지는 좁고 가파른 돌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으며, 올라갈수록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쿠엥카 대성당 (Catedral de Nuestra Señora de Gracia)

도시의 중심인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 우뚝 서 있는 쿠엥카 대성당은 스페인 카스티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입니다. 12세기 말에 착공되어 이슬람 사원 자리에 세워졌으며, 영국 노르만 양식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합니다. 수세기에 걸친 증축과 개조를 거치며 고딕 양식 외에도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미로 같은 중세 골목과 마요르 광장

마요르 광장 주변에는 시청 건물과 라스 페트라스 수녀원 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들을 따라 걷다 보면, 망가나 탑(Torre de Mangana)을 비롯한 중세 요새의 흔적들과, 쿠엥카의 독특한 도시 구조를 잘 보여주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많지만, 대신 곳곳에서 협곡 아래의 자연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전망대가 숨겨져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절벽 위 아파트: 산 마르틴 지역의 '마천루'

쿠엥카의 구시가지에는 흥미로운 건축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산 마르틴(San Martín) 지역의 건물들입니다. 지형을 따라 건설된 이 아파트들은 길가에서는 평범한 3~4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절벽 쪽으로 가면 10층이 넘는 '마천루'처럼 높게 솟아 있습니다. 이처럼 쿠엥카는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어 요새를 구축하고 도시를 확장했던 중세 도시 계획의 완벽한 사례를 보여주었습니다.

쿠엥카 주변의 자연 경이: '마법의 도시'와 '악마의 창'

  • 악마의 창 (Ventana del Diablo): 쿠엥카 근처에 있는 자연 전망대로, 타호강 지류가 만든 깊은 협곡을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수백만 년 동안 바람과 물이 빚어낸 석회암 지형은 그 이름처럼 신비롭고 드라마틱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마법의 도시 (Ciudad Encantada): 쿠엥카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수많은 기묘한 모양의 돌(카르스트 지형)들이 마치 도시의 조각상처럼 서 있는 곳이었습니다. 침식 작용이 만들어낸 자연 예술 작품같았습니다.

한국과 스페인, 쿠엥카 여행자를 위한 팁

  • 가는 방법: 마드리드 아토차(Atocha)역에서 고속열차(AVE/Avant)를 타면 쿠엥카 페르난도 소펠(Cuenca Fernando Zóbel)역까지 약 50분 소요됩니다. 기차역은 신시가지에 있으므로, 구시가지까지는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 합니다.
  • 자매결연의 증거: 시청 근처의 여행 안내소(Oficina de Turismo)에 들러 한국 파주와의 교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입니다.
  • 여행 시기: 여름은 매우 덥지만, 봄과 가을은 걷기 좋은 날씨입니다. 해가 질 무렵 산 파블로 다리에서 보는 매달린 집의 야경은 필수 코스입니다.

지리적 한계를 넘어선 공존의 아름다움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쿠엥카는 그 아찔한 지형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이슬람 요새에서 기독교 성지로, 군사 도시에서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해 온 쿠엥카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도전과 공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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