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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페루 쿠스코 '모레이(Moray)'에서 만난 잉카의 첨단 농업 기술!

ohara 2025. 10. 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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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페루, 잉카 문명의 심장부 쿠스코(Cusco)를 여행하다 보면 마추픽추와 같은 웅장한 유적 외에도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선사하는 곳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저에게 그런 곳 중 하나가 바로 '모레이(Moray)'였습니다. 거대한 원형 계단식 경작지, 마치 거대한 스피커나 소용돌이처럼 땅속으로 깊이 파고든 모습에 첫눈에 압도당했습니다. 잉카인들의 놀라운 지혜와 과학이 숨 쉬는 이곳의 이야기는, 그 어떤 첨단 기술 연구소보다 저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모레이, 경작지가 아니라 '농업 시험장'이었다고?!

 

모레이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는 이곳이 단순히 작물을 심던 계단식 밭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레이는 잉카 제국이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고대 농업 연구소'이자 '실험 농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거대한 원형 구조는 각 계단마다 미세하게 다른 온도와 습도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깊은 중앙 부분은 가장 바깥쪽 계단보다 온도가 최대 15°C까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축소판 기후 모델링 시스템처럼, 잉카인들이 다양한 작물이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조건을 찾아내기 위한 정교한 실험장이었던 것이죠.

 

잉카인들은 왜 이런 복잡한 시설을 만들었을까?

잉카 제국은 안데스 산맥의 척박한 고지대와 다양한 기후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고, 기존 작물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기술이 절실했습니다. 모레이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서 탄생한, 미래 식량을 위한 거대한 투자이자 선구적인 농업 연구 시설이었던 것입니다.

문자가 없었다는데, 어떻게 이런 첨단 기술을 발전시켰을까?

모레이의 존재 자체가 놀랍지만, 더욱 경이로운 것은 잉카 제국에는 현대와 같은 '문자 체계'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문자가 없으면 고등 문명 발달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잉카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지식과 기술을 기록하고 전수했습니다.

  • 키푸(Quipu): 잉카인들은 매듭이 있는 끈인 '키푸'를 통해 숫자, 통계, 그리고 심지어 서사적인 정보까지 기록했습니다. 키푸는 농업 생산량, 인구 조사, 세금 징수 등 제국의 방대한 정보를 관리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레이에서 얻은 실험 결과 또한 키푸를 통해 기록되고 분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 구전(Oral Tradition)과 실천: 잉카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지식과 기술을 대대로 구전하고, 실제 농업 현장에서 끊임없는 실천과 실험을 통해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모레이와 같은 농업 시험장은 이러한 실천적 지혜가 응축된 결과물입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오랜시간이 지나면 문자로 적은것 보다 구전으로 전달하는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정보가 보전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지식도 구전으로 전달되고 보완되고 발전되어 왔던것 같습니다. 
  • 천문학적 지식: 잉카인들은 뛰어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절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맞춰 파종과 수확 시기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모레이와 같은 정교한 농업 실험에도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문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인들이 이처럼 복잡하고 과학적인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운영했다는 것은, 그들의 관찰력, 분석력, 그리고 조직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실험 설계와 데이터 분석 방식을,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이미 수백 년 전에 구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잉카의 생명선, 감자와 옥수수를 위한 실험실

 

모레이의 주요 연구 대상은 아마도 감자와 옥수수였을 것입니다. 이 두 작물은 안데스 문명의 생명선이자 주식이었으며, 잉카 제국을 지탱하는 핵심 자원이었습니다.

모레이의 각 계단은 해발 고도와 토양 조건에 따라 다르게 조성되어, 다양한 품종의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 어떤 환경에서 가장 잘 자라고, 어떤 품종이 고산병에 강하며, 어떤 품종이 더 많은 수확량을 내는지 연구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기존 품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증대시키는 실험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현대의 '작물 육종 연구'와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초월한 과학적 접근 방식입니다. 잉카인들은 단순히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자연을 이해하고, 심지어 자연의 조건을 인공적으로 조성하여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려 했던 진정한 농업 혁신가들이었습니다.

모레이를 거닐다: 시간과 지혜의 흔적을 느끼다

모레이의 계단을 따라 직접 걸어 내려가고 올라오면서, 저는 그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각 계단의 미묘한 온도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이곳에서 수많은 잉카 농학자들이 씨앗 하나하나에 희망을 담아 실험했을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거대한 원형 계단은 잉카인들의 지구에 대한 깊은 이해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긴 예술 작품이자 과학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그들은 수백 년 전, 우리가 오늘날 고민하는 식량 안보와 지속 가능한 농업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이미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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