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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꿈이 새겨진 걸작: 덕수궁 석조전, 생각보다 훨씬 웅장했던 '황제의 궁전'

ohara 2025. 11. 1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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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덕수궁 야간 관람 후기에서 잠깐 언급했던 석조전에 대하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덕수궁이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서양식 건물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책이나 사진으로만 접했을 때는 그저 아담한 서양식 별채 정도로만 상상했었죠.

막상 현장에서 마주한 석조전은 제 상상을 완전히 깨버리는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서울 도심의 빌딩 숲 사이, 전통 한옥 전각들 뒤편에 우뚝 솟은 이 거대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대한제국(大韓帝國)의 자주 독립 염원과 근대화의 꿈이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듯한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사진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덕수궁 석조전의 놀라운 규모와 역사적 의미, 그리고 당시 국제 정세와 얽힌 흥미로운 비화를 자세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석조전의 스케일과 디자인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뒤편에 위치한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3층 규모의 석조 건물입니다. 실제로 보지 않으면 그 웅장함을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규모의 반전: '별채'가 아닌 '궁전'

한국의 전통 궁궐에는 양반 사대부의 집처럼 아담하고 소박한 건축물이 주를 이룹니다. 그래서인지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 역시 크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석조전은 당시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경운궁의 정식 궁전으로 지어졌습니다.

  • 3층 구조: 지층(하인 대기실, 창고 등), 1층(접견실, 홀 등 공공 공간), 2층(황제와 황후의 침실, 서재 등 사적 공간)으로 구성된 완벽한 근대 건축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 신고전주의 양식: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거대한 이오니아식 기둥들이 건물의 파사드(정면)를 위풍당당하게 받치고 있습니다. 특히 이 기둥들의 높이와 두께는 동시대 다른 근대 건축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합니다.

실제로 석조전 앞에 서면, 거대한 기둥과 대리석 같은 재질이 주는 시각적인 압도감 덕분에 이 건물이 부속 건물이 아니라, "나는 대한제국의 황궁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영국 건축가의 손길: 브라운과 하딩

석조전의 설계는 영국인 건축가 존 맥닐 브라운(J.M. Brown)이 맡았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건축가로, 대한제국 측의 의뢰를 받아 설계도를 작성했습니다. 이후 완공은 또 다른 영국인 건축가 G.R. 하딩(G.R. Harding)이 마무리했습니다. 영국에서 설계되고, 러시아 공사관 주변에 지어졌으며, 대한제국 황제의 꿈을 담은 이 건물은 그야말로 당시 국제 정세와 근대 문물의 복잡한 교차점을 상징합니다.


돌 속에 새긴 꿈: 석조전의 역사적 의미와 숨겨진 비화

이 건물은 고종 황제의 강력한 의지대한제국의 격동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책'이자, 당시의 국제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비화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주독립의 의지와 '황제의 권위'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압력이 거세지자 고종은 자주독립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석조전의 건축은 이러한 '황제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 외교 공간: 1층의 접견실은 외국 공사나 귀빈들을 맞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전통 한복을 입은 황제가 서양식 공간에서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모습은, 전통의 계승과 근대 문명의 수용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추구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을 보여줍니다.
  • 근대 문명의 도입: 석조전에는 당시 최신 문물이었던 전기, 난방 시설, 실내 화장실 등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이 아시아의 후진국이 아닌,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근대 국가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비화 1]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외교적 줄타기

석조전 건설에는 흥미로운 외교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가(아관파천), 그 인근인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경운궁의 서양식 건물 건설을 러시아 측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고종은 굳이 영국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 일본, 영국 등 열강 사이에서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고종의 고도의 외교적 줄타기를 보여줍니다. 즉, 석조전은 단순히 건축물을 넘어선 대한제국의 '외교적 균형추' 역할까지 수행했던 것입니다.

[비화 2] 공사 완료 직후의 비극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되어 191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공사 기간만 무려 10년이 걸렸는데, 문제는 완공된 해인 1910년이 바로 한일 병합이 이루어진 해라는 점입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서 가장 화려하고 위풍당당하게 설계되었지만, 정작 고종 황제는 완공된 석조전에서 황제로서의 공식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웅장한 건축물이 대한제국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과 겹쳐져 있다는 사실은, 석조전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역사의 아픔, 그리고 복원

일제강점기에는 석조전 동관 앞에 일본식 건축물인 석조전 서관이 지어졌고, 동관은 이왕가 미술관 등으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건물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200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인 고증 및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현재의 석조전은 1910년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복원되어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석조전 서관과 동관

현재 우리가 보는 웅장한 신고전주의 건물은 석조전 동관이며, 복원된 대한제국역사관입니다. 그 옆에 있는 석조전 서관 (구 이왕가 미술관, 현재 덕수궁 미술관)은 일본에 의해 지어졌으며 외형도 다릅니다. 두 건물을 함께 보며, 격동의 역사 속에서 덕수궁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상상하니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덕수궁 석조전은 저에게 '생각보다 훨씬 웅장했던' 반전의 건축물이었습니다. 단순한 서양 건물이 아니라, 고종 황제의 마지막 독립 의지와 근대화 열망, 그리고 국제 정세 속 외교적 고뇌까지 담겨 있는 귀중한 유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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