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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절절한 '가족愛'와 이응노의 '민족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향수, 고향을 그리다》

ohara 2025. 11. 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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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80년, 예술로 그린 '고향'과 '가족'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MMCA)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는 예술 전시를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아프고도 깊은 정서를 되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역사 체험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분단, 한국전쟁이라는 격랑 속에서 살아남아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던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2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통해 울려 퍼집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이응노 화백과 이중섭 화백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였으며, 이 모든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공간, 즉 덕수궁 석조전 서관의 역사적 배경까지 알고 나니 관람의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이중섭, '가족'이라는 영원한 고향을 찾아 헤매다

 

《향수, 고향을 그리다》 전시는 '향토', '애향', '실향', '망향'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구성되는데, '실향(失鄕)' 섹션의 중심에는 이중섭 화백의 작품들이 관람객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사랑하는 아내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태현, 태성)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한에 머물며 평생을 재회에 대한 염원으로 살았습니다.

이중섭에게 있어 고향은 지리적인 평안도 평원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가장 간절하고 영원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눈물로 그린 '편지화'와 가족에 대한 열망

 

이번 전시는 이중섭의 유화 작품뿐만 아니라, 그가 일본의 가족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화와 드로잉들을 통해 그의 절절한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는 고독과 가난 속에서 피어난 예술가의 애끓는 사랑의 기록입니다.

  • 희망의 상징, 아이들: 편지화 속에는 이중섭의 대표적인 모티브인 아이들, 게, 물고기 등이 천진난만하게 등장합니다. 이들은 종종 벌거벗은 채 뛰어놀거나, 물속에서 물고기와 어울려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당시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가족이 평화롭게 재회할 '천상의 화원' 같은 이상향을 꿈꾸었던 그의 간절한 소망을 반영합니다. '게와 아이들', '가족과 해변' 등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짙은 슬픔과 동시에 강렬한 생명력과 희망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 고독한 황소의 절규: 그의 서간문(편지글)에는 "나는 외로운 황소처럼 울고 있다"와 같은 절규에 가까운 문장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중섭의 가장 유명한 '황소' 그림들 역시 단순한 동물을 넘어,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가족과 떨어져 홀로 고독하게 버텨야 했던 화가 자신의 강인하면서도 애처로운 자화상을 상징합니다. '실향'이라는 주제 아래, 이중섭의 작품들은 이산의 아픔에 대한 깊은 공감과 더불어, 인간이 가장 절박한 순간에 추구하는 근원적인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합니다.

 '향수'의 스펙트럼: 이응노와 시대적 그리움

이중섭의 '실향'이 가족이라는 미시적인 단위에 집중되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이응노화백의 작품은 분단과 망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집단적 향수'를 보여주며 '망향' 섹션을 풍성하게 채웁니다.

  • 이응노의 '군상': 유럽에서 활동하며 동양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이응노 화백의 후기 '군상' 시리즈는 한국 전통 서예와 현대 추상을 결합한 독창적인 형태를 띱니다. 수많은 사람이 얽혀 춤을 추는 듯한 이 형상들은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민족 공동체의 염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낯선 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인간 형상을 통해 분열된 공동체의 재결합에 대한 희망을 시각화하려 했던 그의 예술혼이 느껴집니다.
  • 향토애와 이상향: 또한 박수근, 김환기, 변관식 등 다른 근대 거장들의 초기 작품에서는 '향토'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소박하고 정겨운 농촌 풍경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근대화 이전의 순수한 한국적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관람객에게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따뜻한 회상과 이상화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번 전시는 화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고향'이라는 정서의 복잡한 스펙트럼을 훌륭하게 엮어내, 관람객이 각자의 '향수'를 발견하게 합니다.

슬픈 운명의 공간: 석조전 서관의 아이러니

 

이 모든 애달픈 '향수'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석조전 서관)은 그 자체로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를 상징하며 전시의 주제에 깊이를 더합니다.

  • 태생의 아픔, 이왕가 미술관: 석조전 서관은 대한제국의 위용을 상징했던 석조전 동관(1910년 완공) 옆에,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이왕가 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지은 건물입니다. 자주독립을 상징했던 황궁 옆에, 조선 왕실의 권위를 격하시키고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동관이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이라면, 서관은 간결하고 실용적인 근대 건축 양식을 따르는데, 이는 건축을 통해 권위와 쇠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적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역사적 치유의 공간으로: 해방 후 이 건물은 여러 용도를 거쳐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개관했습니다. '향수, 고향을 그리다'라는 주제의 전시가, 일제의 잔재가 뒤섞인 이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깊은 역설이자 의미를 가집니다. '빼앗기고 잃어버린' 역사적 공간이었던 서관이, 이제는 실향민 화가들의 그리움이 담긴 예술을 통해 한국 근대 미술의 보고로 거듭나며 역사적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작품과 공간이 엮어내는 이러한 상호작용은 이번 전시의 가장 독창적인 감동 포인트입니다.

《향수, 고향을 그리다》 전시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기억과 정서적 뿌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수작입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 덕수궁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만나는 한국 근대 거장들의 '향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삶의 뿌리와 그리움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렬한 힘을 선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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