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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황금빛 미스터리! 은행나무는 활엽수일까요, 침엽수일까요?

ohara 2025. 11. 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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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온 도시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이 아름다운 단풍의 주역은 바로 은행나무입니다. 넓고 부채꼴 모양의 잎이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잎이 이렇게 넓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데... 은행나무는 당연히 활엽수 아닌가?"

하지만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잎맥이 손바닥처럼 퍼지는 일반적인 활엽수와 달리, 은행잎은 평행하고 촘촘한 직선형 엽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미묘한 특징이 바로 은행나무가 가진 수수께끼의 시작입니다.

은행나무는 우리가 흔히 아는 활엽수나 침엽수의 범주를 벗어나는,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인 독특한 존재입니다. 2억 7천만 년의 세월을 견뎌온 '살아있는 화석' 은행나무에 얽힌 비밀을 살펴 보겠습니다.

 


은행나무의 정체: 활엽수도 침엽수도 아닌 '나자식물'의 귀족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은행나무는 활엽수도 침엽수도 아닌, 그 중간의 독자적인 계통군을 형성하는 식물입니다.

 잎의 모양: 활엽수처럼 보이지만

은행나무의 잎은 넓적한 부채꼴 모양(엽맥이 갈라진 침엽이 모여 하나의 넓은 잎을 이룬 형태라는 해석도 있습니다)으로, 잎이 넓은 활엽수의 외형적 특징을 가집니다. 활엽수는 대개 씨앗이 씨방 속에 들어있는 속씨식물(피자식물)입니다.

속의 본질: 침엽수와 가까운 족보

하지만 은행나무의 씨앗(우리가 먹는 은행 열매의 알맹이)은 씨방에 싸여있지 않고 겉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밑씨가 그대로 드러난 식물을 겉씨식물(나자식물, 裸子植物)이라고 부릅니다.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가 바로 이 겉씨식물에 속합니다.

  • 학술적 분류: 은행나무는 과거에는 침엽수와 가까운 구과식물에 분류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은행나무문(Ginkgophyta)이라는 독자적인 계통군으로 분류됩니다.
  • 세포 구조: 목재의 세포 구조나 수분 이동 통로(헛물관) 등 여러 내부 특징이 소나무 같은 침엽수와 유사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무를 잎의 모양(넓다 vs 뾰족하다)으로 나눌 때는 논란이 많지만, 식물학적으로는 씨앗의 형태(겉씨 vs 속씨)를 기준으로 겉씨식물 계통에 속하며, 침엽수와 더 가까운 족보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2억 7천만 년의 생존기: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이유

은행나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는 바로 살아있는 화석입니다. 이는 은행나무가 공룡이 번성했던 중생대 쥐라기(약 2억 년 전)부터 거의 모습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생존해왔기 때문입니다.

대멸종을 견딘 근성

고생대 페름기 대멸종(당시 지구 생물종의 96% 멸종)과 중생대 말 대멸종을 포함한 수많은 격변을 겪으면서, 한때 북반구 전역에 수십 종이 번성했던 은행나무의 친척들은 모두 멸종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오직 '은행나무' 단 한 종만이 남아,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이라는 유일무이한 타이틀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압도적인 생존력이 '화석'이라는 별명을 낳았습니다.

노화 없는 불멸의 생명력

2020년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은행나무는 나이가 들어도 인간이나 동물처럼 노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줄기세포 활력: 나무의 줄기세포 역할을 하는 분열조직은 수백 년이 지나도 20대 청년 나무와 같은 수준의 스트레스 저항력과 활력을 유지합니다.
  • 죽음의 원인: 은행나무는 노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가뭄, 해충, 또는 인간의 개발 등 외부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중 최고령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약 1,100년)가 여전히 웅장하게 서 있는 이유도 바로 이 강력한 생명력 덕분입니다.


은행나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냄새, 학문, 그리고 인류

은행나무는 긴 역사만큼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애증의 열매, 냄새의 비밀

가을철 은행나무가 '애물단지'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열매 때문입니다. 이 냄새의 주범은 겉껍질 속 점액에 함유된 비오볼과 부탄산(Butanoic acid, 썩은 버터 냄새) 등의 성분입니다.

  • 생존 전략: 이 독성이 있는 악취는 새나 다람쥐 같은 현존하는 동물들이 종자를 먹지 못하도록 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은행나무의 생존 전략입니다.
  • 인간이 유일한 매개체: 오늘날 야생의 은행나무가 발견된 곳은 중국 저장성 일부 지역뿐이며, 전 세계의 은행나무는 대부분 인간의 손으로 심어진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냄새 때문에 현대에는 인간이 은행나무를 돕는 유일한 번식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학문의 상징

공자의 제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하는데, 이 '행(杏)'이 원래는 살구나무를 뜻함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은행나무가 학문과 배움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일본 도쿄대학이나 우리나라 성균관대학교 등 유서 깊은 교육 기관의 엠블럼에 은행잎이 새겨진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도시의 수호자

은행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공해(미세먼지, 매연)에도 잘 견딥니다. 또한 껍질이 두껍고 코르크질이 많아 불에도 잘 타지 않아 방화수의 역할까지 합니다. 서울시 가로수 중 은행나무가 약 35%로 가장 많은 이유도 이처럼 도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나는 뛰어난 내구성 덕분입니다.


살아있는 기적, 은행나무를 즐기는 가을

은행나무는 겉으로 보기엔 잎이 넓은 활엽수 같지만, 씨앗의 구조나 내부 특성으로 볼 때 침엽수에 더 가까운 족보를 가진 독자적인 생존왕입니다. 다음 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며 2억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 살아있는 기적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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