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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요새: 난공불락의 신화가 깨진 포트 펄라스키(Fort Pulaski)

ohara 2025. 9. 12.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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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장한 요새의 모습과 함께 미국 역사의 굵직한 흔적을 품고 있는 포트 펄라스키 국립 기념물(Fort Pulaski National Monument) 은  미국 남부의 고풍스러운 도시, 조지아주 서배너(Savannah) 근교에 있습니다. 

사바나 다운타운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낡은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요새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처음 그 모습을 마주했을 때, 저는 마치 영화 속 중세 시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포트 펄라스키는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인 폴란드 장교, 카시미르 펄라스키(Casimir Pulaski)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1829년부터 무려 18년에 걸쳐 지어진 이 요새는 그 견고함 때문에 당시 "난공불락(impregnable)"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요새를 둘러싼 깊은 해자를 건너는 다리를 건너는 순간, 완전히 다른 시대로 들어선 기분이었습니다. 두꺼운 벽돌벽과 아치형 통로, 그리고 늘어서 있는 대포들을 보며 이곳을 지켰던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

난공불락의 신화, 단 30시간 만에 무너지다

포트 펄라스키의 역사는 단순히 웅장한 건축물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사 기술의 혁신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남부 연합군에게 점령된 이 요새는 1862년 4월, 북부 연방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남부군은 이 요새의 두꺼운 벽돌벽이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부군은 이전의 둥근 포탄을 쏘는 '평사포'와는 차원이 다른 신형 무기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강선포(Rifled Cannon)'였습니다. 당시에는 최첨단 무기였던 강선포는 포신 내부에 나선형 홈이 파여 있어, 포탄이 발사될 때 회전하면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덕분에 사정거리가 훨씬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명중률과 파괴력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고 합니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북부군의 맹렬한 강선포 공격을 받은 요새의 벽돌벽은 마치 치즈처럼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요새는 불과 30시간 만에 항복하고 맙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이 전투 이후 거대한 벽돌 요새를 짓는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포탄에 맞아 움푹 파인 벽과 부서진 벽돌 조각들을 보며, 그날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 역사책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생생한 경험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요새 곳곳의 이야기

 

포트 펄라스키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미국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박물관이기도 했습니다. 방문자 센터와 요새 내부 곳곳의 전시물들은 남북전쟁의 배경과 당시의 삶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노예 제도에 대한 전시였습니다. 당시 서배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면화 산업이 주요 경제 기반이었고, 이는 노예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전시관에서는 흑인 노예들의 고된 삶과 그들의 사진, 그리고 이들을 착취했던 시대의 아픈 기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포트 펄라스키가 방어했던 무역 항로 또한 이러한 노예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요새의 의미가 단순히 군사적 요충지를 넘어선다는 것을 깨달았죠. 남북전쟁의 복잡한 배경과 함께 요새가 가진 또 다른 이면의 역사를 마주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또한, 요새 내부를 거닐다 보면 당시 병사들의 숙소와 식당, 보급창고로 사용되던 방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차갑고 습한 벽돌로 지어진 공간들을 둘러보며 병사들의 고된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습니. 한때 요새의 방어와 공격을 위해 사용되었던 포대들은 이제 평화로운 바다를 향해 정렬되어 있었고, 그 모습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새를 둘러싼 또 다른 세상, 아름다운 자연

포트 펄라스키는 역사 유적지이지만, 그 주변의 풍경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새를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습지대는 조지아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조용히 흐르는 사바나강과 잔잔한 물결 위를 나는 새들을 보며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죠.

이곳은 다양한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운이 좋으면 악어나 왜가리 같은 동물들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하니, 자연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도 좋은 여행지가 될 것 같아요. 요새의 장엄함과 대비되는 자연의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역사와 힐링이 공존하는 곳

포트 펄라스키 국립 기념물은 단순히 '옛날 요새'가 아니었습니다. 한때 난공불락이라 불렸던 요새의 비극적인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미국 역사의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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