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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集安)에서 만난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Ji'an)은 한때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이곳은 고구려 전성기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장수왕릉(長壽王陵)은 한국인에게 유적 이상의 벅찬 감동과 함께 서글픈 감정을 안겨주는 장소입니다.
저는 최근 이 역사의 현장을 방문했으며, 교과서와 박물관의 탁본으로만 보던 위대한 유물을 직접 대면하는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현장에서 느꼈던 감동과 함께 중국 정부의 태도로 인해 느꼈던 복잡한 심경을 함께 기록합니다.

유네스코 유산, 그러나 접근은 제한된 역사: 지안 고구려 유적
지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고구려 왕조와 왕릉 및 묘지'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직접 마주한 민족의 상징
- 박물관에서 보던 모형이나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와 위용에 넋을 잃게 됩니다. 이 비석은 높이 약 6.39m에 달하며, 고구려의 건국 이념,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 그리고 왕릉 수묘인(守墓人) 제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 실제로 비문(碑文)의 글자들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올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을 직접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비는 현재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과거 일제강점기에 비문이 훼손되거나 석회가 덧칠되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비석 보호각 안에서의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중국 정부가 이 유물을 유네스코 유산으로 관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관리가 소홀하거나 표지판 설명이 부실한 모습은 '과연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장수왕릉: 동양의 피라미드

- 웅장한 규모: 광개토대왕의 아들이자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장수왕(長壽王)의 능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거대한 화강암 돌들을 7층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형태로,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릴 만큼 독특하고 웅장합니다.
- 건축 기술의 정점: 무덤을 쌓는 데 사용된 돌들의 정교한 가공 기술과 거대한 무게를 견디는 축조 방식은 1,500년 전 고구려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특히 무덤 주변에는 왕릉을 보호했던 거대한 호석(護石)들이 남아있어 고구려의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불편함': 동북공정과 현장 통제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들이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서글픔'과 '불편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입니다. 특히 현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경험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 가이드를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의 정책상 유적지 내부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이 엄격히 통제됩니다. 이는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 중국은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을 진행해 왔습니다. 현장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한국의 역사적 관점(예: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기사' 해석, 고구려의 영토 확장 등)을 설명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유적에 대한 역사 해석의 주도권을 중국 정부가 독점하려는 의도가 엿보였습니다.
-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그 역사적 의미와 감동을 현장에서 해설과 함께 공유할 수 없다는 현실은 매우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조상의 유물을 소중히 보존해주지는 않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후손에게는 제대로 설명조차 허용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벅찬 감동과 함께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서글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감동을 간직하며
이러한 서글픔에도 불구하고, 지안 방문은 한국인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고구려가 스스로 기록하고 남긴 당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와 고구려의 지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사료입니다. 비록 풍화되고 훼손되었으나, 그 기록의 힘은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합니다.
- 장수왕은 무려 79년 동안 재위하며 고구려를 최전성기로 이끌었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 왕입니다. 그의 능으로 추정되는 이 거대한 돌무덤은 고구려가 얼마나 강력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국가였는지를 웅변합니다.
지안은 우리 역사의 위대함과 현재 우리가 처한 국제적인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현장 경험은 오히려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지키고 기록해야 한다는 교훈을 강렬하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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